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4세 (문단 편집) === 나바르 국왕 === 1570년 8월 평화조약이 체결된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에게 아주 관대한 포교령이 내려졌고, 내전의 종식을 기대하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이디어[* 가톨릭이라면 치를 떨던 잔 달브레로서도 내치기는 아까운 제안이었던 것이, 앙리를 카트린의 아들들 다음 순위의 왕위계승자로 인정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앙리 드 나바르가 프랑스 궁전에 있을 때 고려된 적이 있었다.]로 왕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의 혼담이 프랑스와 나바르 사이에서 오갔다. 이 혼담은 1572년 봄까지 질질끌다가 두 어머니들 간의 합의로 마침내 앙리는 마르그리트(일명 '마르고')와 결혼하게 되었다. 둘의 결혼이 확정된 뒤에 먼저 [[프랑스 파리|파리]]로 떠난 잔 달브레가 파리에 도착하고 2개월 뒤인 1572년 6월 9일 호흡기 질환으로 승하하면서 앙리 드 나바르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나바라의 국왕 '''헨리케 3세'''가 되었다. 8월 18일, 예정대로 마르그리트 공주와 노트르담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하여 카트린과 잔의 의도대로 두 가문이 화해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리거라고 생각했으나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나 버렸다.''' 위그노파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이 아들인 [[샤를 9세]]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꺼림직하게 여겼던 카트린이 가톨릭파의 기즈 공작가와 결탁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샤를 9세를 충동질하여 벌인 대학살극 당시 헨리케 3세는 카트린에 의해 반쯤 감금당하기도 했고, 그 사이에 콜리니 제독을 포함한 파리에 있던 위그노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면서 고립되고 말았다.[* 당시 부르봉 가문과 [[위그노 전쟁]]에서 자웅을 겨뤘던 기즈 가문의 살생부에 의하면, 헨리케 3세는 부르봉 가문의 당주였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차마 신랑인 사위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카트린과 마르그리트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신 심복들을 붙여놓고 밤낮으로 감시했다.] 이후 프로테스탄트를 포기하라는 샤를 9세의 명령에 굴복해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그후 3년 동안 감금되었다. 이후 파리에서 그럭저럭 유폐생활을 보내던 중, [[샤를 9세]]가 죽고 [[앙리 3세]]가 즉위한 후 암군으로 돌변하면서 1576년을 기점으로 국내의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나바르 왕국에 도착해 다시 위그노로 개종,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다. 나바르 왕국은 신교도의 집결지[* 나바르 왕국이 위그노에 동정적이었던 것은 헨리케 3세의 외조부 나바르 왕 앙리 2세(바스크어로는 '헨리케 2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나바르와 가톨릭의 악연은 그보다 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교황 [[율리오 2세]]가 주도하여 프랑스의 [[루이 12세]]에 대항한 신성동맹에서 나바르 왕국은 중립을 선언했다가 이전부터 나바르를 노리던 페르난도 2세에게 탈탈 털리고 왕가는 [[파문]]당한 적이 있었다(…).]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헨리케 3세는 '''제6차 위그노 전쟁'''(1576~1577)에서 신교도의 맹주가 되었다. 하지만 헨리케 3세는 위그노들이 계속 연패를 해오면서 열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설득하여 1577년 위그노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베르주라크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가톨릭 진영에서 가론 강 연안의 '''라레올 성'''을 점령하자 곧바로 '''폴뢰망스'''를 기습 공격했다. 이후 1580년 봄에 '''카오르'''를 공격해 점령했고, 나아가 1583년 자신의 소유지였던 '''몽드마르''' 시가 반환되지 않자 야간 공격을 감행해 점령했다. 1584년 2월 앙리 3세의 동생인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의 신교도인 [[빌럼 1세(오라녀)|빌럼 판 오라녜]]에 의해 네덜란드의 군주로 추대받았다가 '''안트워프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 후 죽으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왕가의 가까운 친척으로는 나바르 부르봉-방돔가의 헨리케 3세와 그의 숙부였던 루앙의 추기경 샤를 밖에 없었는데, 특히 헨리케 3세의 경우, 앙리 3세와는 그닥 멀지 않은 '''6촌''' 형제 관계[* 앙리 3세의 할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와 헨리케 3세의 할머니인 나바르 왕비 마르그리트는 서로 남매였다.]였지만 왕위 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계로는 '''21촌''' 관계였다.[* 앙리 3세와 헨리케 3세의 공통 조상인 '성왕' [[루이 9세]] 드 카페를 기준으로 하면, 헨리케 3세로부터 10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루이 9세가 나오고, 앙리 3세로부터 11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루이 9세가 나온다.] 하지만 <[[살리카법]]>에 의해 훗날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